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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포도주와 성전(요한복음 2장)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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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성전(요한복음 2장)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조된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고, 하늘의 기쁨과 주의 품안에 있는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혼인잔치 집에 기쁨과 교제의 근원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 영혼의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결예식을 생명처럼 여기는 이스라엘에게 물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더 이상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친히 찾아와주시고 당신의 생명의 말씀으로 질그릇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더럽혀진 물이 깨끗한 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본질로 변화되는 역사 이것은 주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여기에 사람의 순종(하인들의 순종)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감사가 되어집니다. 주님은 포도주의 이적을 통해 질그릇에 담긴 우리의 영혼의 본질적 변화, 거듭남을 그림자처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4-56).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 라”(요19:34). 


  포도주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생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당신의 생명, 홀로 고난당하시며 물과 피를 따 쏟으신 주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얻어내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우신 주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는 하늘 생명에 속하는 포도주가 됩니다. 


 포도주의 사건 후에 주님은 바로 성전을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목적인 주님의 거룩과 영광가운데 우리를 참여케 하는 성화의 삶을 보여줍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제사 지내는 데 꼭 필요한 흠이 없는 제물을 검사하여 합격판정을 내렸고, 합격 판정을 받은 제물만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위를 악용하여 양과 소와 비둘기를 성전에서 파는 것으로만 사용이 가능 하도록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과의 커넥션이 있었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님은 장사하는 유대인들의 장사판을 엎으시 고 쏟으시고 내쫒으시며 외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며 (고전6:19) 장사는 자신에게 이익을 남기기 위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가 하는 장사하는 자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을 결정하는 과정과,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며 심지어 교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선택하는 결정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돌려줄까 하는 고민과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유리한 것을 헤아리기 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선택하심으로 온 생애를 살아내신 주님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며, 이루어 내시기 위해, 장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영혼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토해 내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막11:17).


기도는 주님께서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신 깊고도 친밀한 대화의 방식이었 습니다. 이를 마가가 기도하는 집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며 주님과 함께하는 사귐의 공간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절). 우리를 사랑하신 열심이 지나치셔서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관제와 같이 번제와 같이 당신의 온 생애를 부어주시고 불태우신 주님의 생애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하심 과 그분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특심한 사랑 이었습니다. 또한 장차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질 거룩한 교회의 벽돌인 한 장 한 장의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죄의 값을 완전히 다 치루셨기에 주님은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일 죄의 값이 완전하게 치루어지지 않았다면 주님은 아직도 무덤에 계실 것입니다. 주의 완전하신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차고도 넘치게 다 씻어 내셨습니다 (사1:18).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의로움은 요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 지낸바 되었고,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앉힌바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우리 주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임마누엘은 오늘날 우리에게 언제나 현재적입니다. 


   주의 죽으심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신앙의 본질입 니다. 예전의 화려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고백보다,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 하시는 임마누엘은 항상 현재적인 부활 신앙입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았던 여인들을 주님은 현재적인 부활 신앙으로 만나주셨습니다(눅24:5). 우리의 믿음은 과거 (오신 주님, 속죄)를 토대로 삼아 미래(오실 주님, 영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우편 강도에게 약속하신 오늘,  주님은 우리와 함께(임마누엘)  살아 계시며  동거하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과 성전을 정결케 하심은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목적과 경륜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지상사역의 서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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