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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아담 Ⅲ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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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담 Ⅲ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뱀 사이에 문제를 두셨다. 


 비록 남자와 여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 죄의 쓰디쓴 열매를 개인적으로 거둬들여야만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뱀이었다. 


 뱀은 파멸의 근원이었고 여자의 후손은 구속의 근원이 되어야만 했다. 아담은 이 모든 것을 들었고 믿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능력으로 아담은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 3:20) 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믿은 고귀한 열매다. 


 이 문제를 순전히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와는 모든 죽은 자의 어미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판단에 따라 보면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였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슬픔의 아들)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 불렀더라"(창 35:18).


  아담이 자기가 행한 것의 무서운 결과들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굴할 줄 모르는 믿음의 힘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아담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셔야만 했던 것을 아담이 듣기 이전에,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던 것부터 듣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에서 온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은 분명히 절망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단지 나 자신만 바라봐야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절망이다. 
  
  아담의 후손치고 십자가 안에서 피난처를 취하지 않는 한, 자기 실상과 자기 소행(所行)의 실재를 바라보고 절망에 빠지지 아니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머무는 그곳에는 소망이 없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눈이 열려 그들의 실상과 그들의 소행이 어떤 것인지는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피난처와 피신은 발견해 내지 못한다.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은 영원한 구원을 진실로 내포하고
   계시지만, 
   그때  거기서의 하나님은 절망적인 멸망을 내포하고 계신다.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의 거룩성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그 때 거기서의 하나님의 거룩성은 영원히 그들을 거부한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식하면 할수록 나의 안전을
   더욱더 알게 되는 결과가 되겠지만, 그러나 
   잃은 영혼 상태에서는 바로 그 거룩성은 그들의 영원한 불행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이 얼마나 엄숙한 결과인가!
   



매킨토쉬 모세오경 창세기 3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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