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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단 한 번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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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단 한번.jpg

 

 

 

서양 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단연코 인색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Thank you, Sorry'를 되뇌이는 외국인들에 비해 우리는 여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듯 하다.

오랜 유학 생활 덕분에 나는 그나마 ‘고맙다’는 말은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조교나 학생들이 심부름을 해 주거나 시중을 들어주면 곧잘 ‘고마워’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미안해’라는 말은 여간 어렵지 않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안해’ 라는 말을 하려면 목소리가 기어들거나 가능하면 슬쩍 얼버무려 버린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할 때도 그렇다. 게다가 가끔씩은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적도 있다.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오해는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게 보이거나 못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나의 성격적 결함을 머리 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쨌거나 그 말이 목에 딱 걸려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기까지 한다. 왜 ‘미안해요’라는 짧은 한 마디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중략)

지난 주, 19세기 미국 소설 강의 시간에, 나는 한 학생에게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첫 장면을 읽도록 시켰다. “김영수, 23페이지 첫째 단락을 읽어 보세요.”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풀이했다. “23페이지 첫째 문단 말이야.”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의아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학기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났으니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 또한 내가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호명한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에 대한 반항이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욕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화를 눌러 참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

“지금 책 읽은 학생이 김영수에요?”


나는 정색을 하고 선생으로서의 위엄과 자존심을 건드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자기 이름들도 몰라요? 결석한 친구 대신 대리 대답하는 학생들이 있다더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예 버릇이 돼서 이젠 친구 이름을 자기 이름인 줄로 착각할 정도인가?”
나는 야유까지 했다.

 

반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영수와 서훈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할 수 없어서 강의를 계속했지만, 수업이 끝나고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에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생 하나가 찾아와 진상을 알려 주었다. 김영수는 아주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를 갖고 있고, 그 증세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읽거나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까 갑자기 말문이 막혀 책을 읽을 수도, 그렇다고 말을 더듬어서 못 읽겠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처지였을 것이고, 그 사정을 잘 아는 서훈이가 당황하는 친구를 도와 주려고 대신 읽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렸을 때 나도 한때 말더듬이 비슷한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영수가 느꼈을 충격과 고뇌, 그리고 수업 시간 이후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영수에게 수업 후에 오라고 할까? 그러면 영수가 더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아니면 삐삐 번호를 알아내어 내게 전화하라고 할까? 하지만 말더듬이 증상은 전화로 말할 때 더 심각해지니까 그것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과를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로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일어났다. 요컨대 그게 정말 내 잘못이었는가 말이다. 영수에게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는가? 학기 시작할 때 미리 자기에게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호명하지 말아 달라고 한마디라도 해 줬으면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말이다. 게다가 선생 체면에 학생에게 그런 말 했다고 해서 사과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쯤은 영수도 다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사과해서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 영수에게 ‘미안해’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만한 온갖 구실들을 발견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고, 오히려 사과하려고 했던 내가 어리석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 바쁜 와중에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결론짓고 그냥 잊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나는 ‘미안합니다’라는 말, 아니 그 말의 위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만 했다. 저녁 때 아버지가 오피스텔에 있는 나를 데리러 차를 갖고 오셨다. 아버지와 내가 공동으로 집필하고 있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위해 출판사에서 얻어 준 오피스텔인데, 나는 주말에 그곳에서 일하곤 한다.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갔는데,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 경비원이 편관 가까이에 차를 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허리를 굽히면서 사과하고 계셨다.

“미안합니다. 잠깐만 있을 겁니다. 제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곧 나올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 연세 쯤 되어 보이는 경비원은 심하게 아버지를 힐책하였다.
 

“아, 글쎄 기다리려면 저기 주차장 안에 차를 대고 기다리란 말예요! 왜 하필이면 현관 앞에 차를 대냐구요.”
 

“미안합니다. 조금만.”
 

아버지는 계속 ‘미안합니다’를 반복하고 계셨다. 물론 차를 현관 근처에 대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경비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너무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서 나는 경비원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경비원은 잠시 나와 목발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더니,

 

“아이구, 정말 죄송합니다. 왜 이 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만약 그랬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이 분이라면 몸이 불편하시니까 여기 대셔야지요. 이 분을 자주 뵈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중간중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인가!

 

서로 얼굴 붉히고 마음 상하고 헤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기꺼이 “미안합니다”하고 사과를 했기 때문에 결과는 해피 엔딩이었다. 아마도 나라면 아버지처럼 사과하는 대신 “금방 간다는데 왜 그러세요?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세요?”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고, 경비원도 사과하는 대신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지, 아무리 몸이 불편한 사람 기다린다고 차를 현관 앞에 세우다니” 생각하면서 뽀로통한 얼굴로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도 많고 인생 경험도 풍부한 두 사람은 해피 엔딩을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미안합니다’라는 말의 효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차를 타고 나서 아버지에게 투덜댔다.

“아버지, 왜 그런 사람한테까지 허리를 굽히고 그래. 채신없어 보이잖아.”
 

그러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채신?  잘못한 거 사과하는 데 채신은 무슨 채신이냐?”

문득 영수 얼굴이 떠올랐다. 잘못한 것 사과하는데 선생 체면은 무슨 선생 체면? 수업중에 내가 한 말 때문에 영수가 아직도 상심해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수업 끝나고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얘, 영수야, 지난번엔 미안했어. 수업중에 읽는 것 시키지 말라고 말해 주지 그랬니. 모르고 그런 거니 용서해 줄 거지?”

이번 일을 계기로 나도 ‘미안합니다’를 좀더 자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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