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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전도사역(행19:1-22)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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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전도사역(행19:1-22)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구원받기 전 아볼로가 처해 있던 상태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12명의 제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아볼로의 제자였다고 추정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중략~~ 바울과 아굴라 및 브리스길라 는 모두 자신의 부르심 의 영역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큰 규모의 사역이 시작되려면 바울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혼자서 시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가정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두신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 12사람들이 유대인들과 다르면서도 그들 안에 기독교의 근본 능력과 증거가 결여되어 있음을 금새 간파 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문제를 밝혀내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나? 틀림없이 그 제자들은 성령님에 관해 들었을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그것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요 1: 33).  그들이 몰랐던  것은 성령님이 그 때 ,  거기에  존재해시는가?였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증거는 그들 안에 없었으며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특히 헬라어 원문을 참조할 수 있는 사람들 은 그들의 대답을 요한 복음 7장 39절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의 ”생수”에 관한 언급 후에 다음과 같은 해설의 말씀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곧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 사람들은 참으로 가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열심은 있지만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 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침례” 받았다는 그들의 고백에 답하여 바울은 그 침례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소용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오직  어떤 사람의 믿음을 앞으로 내뻗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요한이 가르친 침례는 단지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를 의미 할 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진실과 그들이 받은 침례의 방식은 옳았지만 그 옮음과 진실이 그리스도의 본체와 성령님의 실재에 관한 그들의 무지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침례 요한은 말했습니다(요 1:31).  
 그러나 그분이 나타나신 후에는  그 침례가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자진하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분에게로 신속히 인도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진하여 요한을 침례의 목적으로 여기는 일을 버리고 주 예수님을 그 자리에 대치시켰습 니다. 아볼로는 그들보다 먼저 동일한 자신성을 보였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 로써 믿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뒤돌아보고 부활하시고 현재 살아 계신 그분을 올려다봅니다. 이와같은 일이 어떤 마음 속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 없이 성령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설명은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더 나은 교훈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적은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본체한테로 인도함을 받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침례의 중요성을 감지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자발성은 거의 들어 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에베소에서는 그 사도의 더 많은 수고를 통해 확대될 불이 당겨졌습니다. 그 사람들 에게 재침례는 중요한 점입니다. 그 방식은 옳았으며 요한의 침례는 그 적당한 시기에 맞게 성경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침례를 받을 때 물에 잠기는  일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했으며  전자가 후자를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것은 오늘날 얼마나 더 필요한 일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유아적에 물뿌림의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성숙해진 때 믿음이 오면 침례에 다시 순종해야하며 이번에는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권위를 갖고 있지 않는 유아 세레는 그 방식에 있어서도 잘못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유아 세례에 도입하는 것도 그 의식을 성경적인 것으로 바꾸지 못합 니다.  ~~중략~~

 따라서  오직 한가지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고넬료의 경우에 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안수없이 성령님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임의 핵이 형성되었으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은 주님의 백성들이 모이기에 알맞은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고전 16:9). 


 이제 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복음전도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강해에서. (by 존 헤딩, 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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