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re]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고찰(축소)

동행
3681 0 0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고찰

   

민족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던 나라(지방)들의 방언을 성령께서 제자들의 입술에 부어주신 목적은 예수님의 되심과 구원자되심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시기위해 제자들이 학습하지 않았던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가게 하셨으며 이것은 천하 각처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지방)의 언어로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행하신 타지역 언어로서의 방언이었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를 쫓는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벽을 만들고 자신 스스로 자신의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은 아니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교훈받는 사실은 공동체내에서 한 몸됨을 - 의사소통을 - 방해하는 알지 못하는 언어는 죄에 대한 심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징계)인 셈이며, 그것은 교회(회중)에게 결코 유쾌하거나 덕스러운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고전14:21)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고전14:22)이라고 하셨을 때 방언의 바른 의미는 오순절 날 방언을 주신 목적과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교회를 얻어내시기 위해 주신 외국어(사람의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함으로 교회를 세우고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음에도 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길 기뻐함으로 분열과 다툼에 휩싸였습니다. ‘방언에 대한 언급이 20여회나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은사의 다툼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 중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다양한 은사들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성도(교회)를 위함이라는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은사의 우열을 따지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뛰어남을 자랑하고 시기함이 가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교제한 이후 바로 사랑의 장이라는 13장을 추가한 것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당시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를 가졌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은사로서의 무익성), 서로 시기해서 더 뛰어나 보이는 은사를 구하더라도 사랑(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돕기 위하여)을 따라 구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고전13:5)

   

황홀경에 빠져 자신에게만 그것도 마음에는 열매 맺지 못하고 자신의 영에게만 유익한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회중)를 위해 주신 은사가 교회(회중)를 위해서는 무익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유익한 은사(방언)라는 것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외국어로서 주신 방언을 통역자없이 혼자 떠들어댄다면 다른 사람들은 생전 처음들어보는 이상한(또는 신비한)언어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방언에 대한 본심은 23절에서 두드러지며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방언에 대해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바울은 과격한 단어까지 사용해가며 자신의 마음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장 전체에 걸쳐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가며 방언보다 예언이 훨씬 더 유익한 은사임을 증명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에 비해 방언의 무가치함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방언을 금하지는 일이 발생할 까봐 바울은 14장을 마무리하며

   

예언하기를 열망하고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전14:39)며 당부를 맺고 있습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말씀이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것은 겨우 용인(容認)하는 정도의 말씀인 셈입니다.

   

이 용인하는 권면조차도 기록된 모든 원칙(2~3명만, 차례를 따라, 통역이 있을 때만)에 의해 교회의 질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용할 때에만 금하지 말라는 것 뿐입니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과 방언의 비교를 끝맺는 이 말씀은 많은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 예언의 은사에 대한 강조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명확히 알아가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들에 대해 위의 말씀을 기준으로 잣대를 대어본다면 성경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격적인 사귐과 교제를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의 직통으로 연결되는 기도를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신비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16:4)

   

무언가 하늘로부터 오는 신비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주님께 엄한 꾸지람을 받거나, 장차 믿음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간절히 구하고 추구해야 될 유일한 대상은 신비한 다른 것들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되신 주님 자신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신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대화한 모든 언어는 방언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각 족속마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게 구사하고 사용했던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한번도 주님은 신비한 언어로서의 방언으로 그들과 대화하지 않았고 그들도 주님과 대화(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편지라는 시편을 살펴보더라도 등장하는 모든 시편기자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과 기쁨, 감사와 회개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해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일상의 언어로 나아왔지 방언을 사용한 기록은 일점일획도 남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힘들이지 않고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힘 안들이고 하는 기도를 지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22:44)

   

마음이 열매 맺지 못하고 영으로 기도한다는 방언은 주께서 의도하신 기도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방언이 필요하였다면 모든 성경이 이에 대해 이토록 일관될 정도로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자들과 등장인물들처럼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사용하는 언어는 각 사람에게 주신 일상의 언어면 충분합니다. 이에 지나는 것은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33:15)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 (계시록2:23)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8:27a)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139:2)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24)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께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피시고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 신비한 방법을 통하여 나가려고 하는 시도는 결코 성경에서 지지하는 바가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방언을 추구하고 중요시한다면 결국에는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한 것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 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끼친다 할지라도, 비슷한 장소에서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십니다. (16:4, 13:22, 4:4)

   

방언을 추구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어떤 미래적 사건을 미리 알려주는 예고)도 함께 등장하여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이나 환상에 무게를 두고, 기타 여러 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언을 중요시하는 곳에는 마침내 그릇된 예언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며 이는 악한 영들이 역사할 수 있는 터를 제공해주게 됩니다.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들을 시험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겠습니까! 시험해 보기까지 분별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며 도리어 경건입니다(17:11). 하나님의 교회가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마귀의 역사도 함께 수용하겠다는 위험한 결정으로 개인과 회중 모두를 위험 가운데 노출시키는 불행한 선택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4:3a)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별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 판단의 표준은 오직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 


(Question) 사도 바울은 사람이 천사의 말(하늘의 언어)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전13:1a)

 

이것은 사도바울이 완곡한 가정법을 사용함으로 사랑이 빠진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위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내가 만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2) 내가 만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3) 내가 만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람의 방언(언어)과 천사의 말(천상의 언어)은 사용하는 대상이 다른 2종류의 언어에 대해 소개하고 있을 뿐이며, 사람이 천사의 말(천상의 언어)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언어를 주셨고, 하늘의 존재들에게는 하늘의 언어를 주신것 입니다. 하늘의 존재들이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지만, 그때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사람의 언어이었지, 사람이 하늘의 언어로 대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 자신이 천사의 말(하늘의 언어)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바울이 천상의 언어는 사람의 입으로 표현 불가능한 언어임을 고백하고 있기때문입니다.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신고공유스크랩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삭제

"[re]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