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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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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고찰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딤후2:5)

  

사람들은 본질상 패역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무언가 새롭고 신비한 것을 추구하고픈 강한 유혹에 쉽사리 노출됩니다. 심지어 복음에 정통하였고 이를 선포하셨던 믿음의 형제님들조차도 신비주의(오순절주의 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걸어가고 달려가야 하는 모든 길과 여정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성장해 나가는데 필요한 모든 교훈과 책망과 생생한 가르침들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서 교회를 이루어가는데 필요한 모든 덕스러운 교훈들이, 성경 66권에 부족함 없이 담겨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말씀의 올바른 이해와 정확한 전달을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저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이 풍성한 삶의 비결인 말씀을 단순한 텍스트로 치부해 버리는 가벼움은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연구)하므로” (17:11)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불완전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듣고 기꺼이 교제할 수 있는 여유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분별하고 깨달은 것이 타협할 수 없는 무오한 진리라는 경직성을 붙드는 순간, 심각하고도 중대한 오류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0:12).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4:3)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아 대조해보고 살펴보는 노력과 주님의 형제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이 항상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4:1)

 

 

방언은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신비주의 흐름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며 폭넓게 퍼져있는 하나의 기류입니다.

 

 

성경에서 방언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은 40회 정도입니다.

 

고린도 전서에 사용된 20(10-1, 12-3, 13-2, 14-14)를 제외한다면 구약과 신약을 모두 합해서 20(역하32:18; 4:7; 13:24; 19:6,18; 28:11, 33:19; 36:11,13; 16:17; 2:6,8; 14:11; 19:6; 계시록5:9; 7:9; 10:11; 11:9; 13:7; 17:11,15) 정도가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10,12~14)를 제외한 신구약의 말씀들이 의미하는 방언은 모두 다른 지방의 언어(외국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언급할만한 한 가지 구절은 이사야 28:11절의 말씀인데. 이를 살펴보면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4:21)

 

 

이것은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 죄 가운데 거했기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벌하겠다고 하신 말씀으로 장차 외국인들(앗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리라고 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 자"란 말은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벌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같은 맥락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징계)인 셈입니다. 그것은 교회(회중)에게 결코 유쾌하거나 덕스러운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고전14:21)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교훈하는 사실 역시 공동체내에서 한 몸됨을 - 의사소통을 - 방해하는 알지 못하는 언어는 죄에 대한 심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탄생하는 시발점이 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증거 - 혹자들의 말처럼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이라고도 표현하더라도 - 로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은 황홀경에 빠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이 아니었으며 죄로 나뉘어진 세상의 언어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됨을 경험케하는 외국어로서의 방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시기위해 제자들이 학습하지 않았던 외국어로서의 방언을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가게 하셨으며 이것은 천하 각처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지방)의 언어로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행하신 타지역 언어로서의 방언이었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를 쫓는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벽을 만들고 자신 스스로 자신의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던 나라(지방)들의 방언을 성령께서 제자들의 입술에 부어주신 목적은 예수님의 되심과 그리스도이심 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고전14:22)이라고 하셨을 때 방언의 바른 의미는 오순절 날 방언을 주신 목적과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외국어로서의 방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주의를 포함한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개혁신앙에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이 천상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아니며 외국어로서의 방언만 해당된다고 언급하고 있고, 사실 성경 전체에서 걸쳐 말씀하시는 방언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사람의 언어가 아닌 방언이 당시 고린도 회중에 병존했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듯 합니다.

   

   

고전 14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외국어로서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사람 중에는 알아듣는 자가 없음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 사람의 지성의 영역이 - 아닌 영으로 드리는 기도로서의 방언을 언급

   

 

19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자신도 깨닫지 못하며 - 지성과 관련 없는 -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언어로서의 방언

   

참고. (고후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위의 구절들 외에 나머지 구절들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으로 이해하고 대체해 읽어도 의미가 통하지만 위의 구절들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으로 대체해 받아들일 때 의미가 부자연스러워집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전13:1a)

 

 

사도바울은 완곡한 가정법을 사용함으로 사랑이 빠진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위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1) 내가 만일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2) 내가 만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3) 내가 만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누어주신 은사가 신비한 하늘의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받은 것과 차별화하는, 하나님과 직통기도를 드리는 천상의 언어 방언에 대한 자부심은 시기와 다툼으로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함으로 교회를 세우고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음에도 당시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길 기뻐함으로 분열과 다툼에 휩싸였습니다. ‘방언에 대한 언급이 20여회나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은사의 다툼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 중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다양한 은사들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성도(교회)를 위함이라는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놓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은사의 우열을 따지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뛰어남을 자랑하고 시기함이 가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교제한 이후 바로 사랑의 장이라는 13장을 추가한 것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의 당시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를 가졌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은사로서의 무익성), 서로 시기해서 더 뛰어나 보이는 은사를 구하더라도 사랑(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돕기 위하여)을 따라 구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고전13:5)

   

황홀경에 빠져 자신에게만 그것도 마음에는 열매 맺지 못하고 자신의 영에게만 유익한 이상한(신비한) 언어로서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고린도교회(회중)에서 행해졌던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 까지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교회(회중)를 위해 주신 은사가 교회(회중)를 위해서는 무익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유익한 은사(방언)라는 것이 무언가 이상합니다 !

 

사람의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가 언급이 되고 있지만(고전13:1) 이 표현은 사랑이 없는 모든 은사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고린도교회(회중)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정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방언에 대한 본심은 23절에서 두드러지며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3)

   

방언에 대해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바울은 과격한 단어까지 사용해가며 자신의 마음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장 전체에 걸쳐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가며 방언보다 예언이 훨씬 더 유익한 은사임을 증명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에 비해 방언의 무가치함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방언을 금하지는 일이 발생할 까봐 바울은 14장을 마무리하며

   

예언하기를 열망하고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전14:39)며 당부를 맺고 있습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말씀이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것은 겨우 용인(容認)하는 정도의 말씀인 셈입니다.

   

이 용인하는 권면조차도 기록된 모든 원칙(2~3명만, 차례를 따라, 통역이 있을 때만)에 의해 교회의 질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용할 때에만 금하지 말라는 것 뿐입니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과 방언의 비교를 끝맺는 이 말씀은 많은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 예언의 은사에 대한 강조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명확히 알아가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다른 교회에 보낸 서신들에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구약시대에서조차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의 언어가 아닌 황홀경에 빠진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에 대해 유독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만 이토록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성경 66권중 다른 곳에서 언급함이 없던 방언’ - 사람의 언어가 아닌 이상한 언어로서의 방언 - 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그것도 단 3구절에서만 암시된 점, 교회의 태동기에 성령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이 복음을 전하기위한 사람의 언어로서의 방언인 점(오순절날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받은 성령의 표증), 성경에 기록된 방언이라는 모든 말씀이 사람에게 주신 이 세상 언어인 외국어로서의 방언이라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유명한 성경 강해자 존 맥아더는 1세기 당시의 고린도교회에는 황홀경의 언어나 무아경의 경험들과 같은 신비 종교가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4:1)

 

 

이러한 이방 종교의 신비적인 위험성외에도 방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밝히 드러내야 할 말씀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방언)로 혼자 기도함으로 회중은 그 감사에 함께 아멘으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들어 공교회의 몸 된 원리를 훼손시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들에 대해 위의 말씀을 기준으로 잣대를 대어본다면 성경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격적인 사귐과 교제를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의 직통으로 연결되는 기도를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신비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16: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13:22)

   

 

무언가 하늘로부터 오는 신비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주님께 엄한 꾸지람을 받거나, 장차 믿음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간절히 구하고 추구해야 될 유일한 대상은 신비한 다른 것들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되신 주님 자신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구약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신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대화한 모든 언어는 방언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각 족속마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게 구사하고 사용했던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한번도 주님은 신비한 언어로서의 방언으로 그들과 대화하지 않았고 그들도 주님과 대화(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편지라는 시편을 살펴보더라도 등장하는 모든 시편기자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과 기쁨, 감사와 회개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해 주님 앞에 엎드릴 때 일상의 언어로 나아왔지 방언을 사용한 기록은 일점일획도 남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힘들이지 않고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힘 안들이고 하는 기도를 지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22:44)

   

자기도 모르는 말을 알지 못할 힘에 사로잡혀서 통제되지 않는 혀로 하는 기도가 영적이라는 말은 성경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상한 기도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앙을 갖기 전에 방언을 한 적이 있었기에 방언이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열매 맺지 못하고 영으로 기도한다는 방언은 주께서 의도하신 기도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방언이 필요하였다면 모든 성경이 이에 대해 이토록 일관될 정도로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자들과 등장인물들처럼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사용하는 언어는 각 사람에게 주신 일상의 언어면 충분합니다. 이에 지나는 것은 위험한 사상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살펴보신바와 같이 오늘날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기독교계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이 결코 아니며 현대판 신접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8:11)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33:15)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 (계시록2:23)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8:27a)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139:2)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24)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께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피시고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 신비한 방법을 통하여 나가려고 하는 시도는 결코 성경에서 지지하는 바가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방언을 추구하고 중요시한다면 결국에는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한 것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의 말씀을 풀어 설명해 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끼친다 할지라도, 비슷한 장소에서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십니다. (16:4, 13:22, 4:4)

   

방언을 추구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어떤 미래적 사건을 미리 알려주는 예고)도 함께 등장하여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이나 환상에 무게를 두고, 기타 여러 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언을 중요시하는 곳에는 마침내 그릇된 예언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며 이는 악한 영들이 역사할 수 있는 터를 제공해주게 됩니다.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들을 시험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겠습니까! 시험해 보기까지 분별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며 도리어 경건입니다(17:11). 하나님의 교회가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마귀의 역사도 함께 수용하겠다는 위험한 결정으로 개인과 회중 모두를 위험 가운데 노출시키는 불행한 선택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4:3a)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별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 판단의 표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성도가 구하고 찾아야 될 유일한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주님 자신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보태려고 하는 시도는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셔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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