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양심

동행
2424 1 0

양심

 

 

우리에게 허락된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보석 같은 축복인지 사람이 알아채기 전까지는 지루하거나 고단한 일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며, 사랑하는 이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보고 싶은 이들과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고, 따스한 햋빛을 받으며 가보고 싶은 곳을 거닐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 일상의 사소히 반복되는 것들은 이것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과 버스가 무사하고, 출장길의 비행기가 무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무감각함 가운데 묻혀진 일상이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죽음과 한 걸음 차이뿐입니다. 그토록 강철같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은 보호막도 찰나의 순간에 찢어지고 부서져 버리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삶입니다.

 

세상의 많은 미개한 종족들을 찾아다닌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신에 대한 제사의식이 없는 종족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신에 대한 의식"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신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있는 이유는 엄마의 태로부터 나온 아기가 엄마를 찾는 본능처럼,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 있는 너무나 많은 증거와 단서들을 우리의 안과 밖에 가득히 채워 놓으셨습니다.

 

사람에게 허락하신 연약함과 한계도 그러한 증거들 중 한가지 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강철같이 깨어지지 않는 몸을 주셨더라면 하나님을 찾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연약함과 한계 가운데 저희를 가두어두심은 사람이 하나님께 찾아오도록 베풀어 놓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신경계는 사람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위험한 외부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뜨거운 불 가까이 갔을 때 신속히 피할 수 있도록 반응해주어서 몸이 더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몸의 신경계처럼 양심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주신 보호 장치입니다. 영혼을 해롭게 하는 죄악들로부터 사람의 영혼이 물들지 않도록 경고와 울림을 주어서 영혼을 보호해주는 영혼의 신경계이며, 사람의 마음 가운데 심어주신 최소한의 법입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해야 하는데.....”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영혼의 울림, 양심의 소리

 

이 소리를 벗어나거나 무시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불순물이며 죄악입니다.

 

아이들조차도 부모님의 돈을 훔칠 때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지만, 자기 안에 있는 심장의 떨림으로 경고하는 양심의 경고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내면의 양심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양심의 소리를 계속 어기고 반복해서 죄를 지어가기에 사람들의 양심은 횟수를 거듭해가는 나이테만큼이나 딱딱하게 화석화되어 갑니다.

 

이 사실은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의 영혼이 본능으로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사람들이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형벌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기며 죄를 범하는 범법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공평하게 돌려받는 형벌이 없다면, 죄를 담대하게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근원에는 형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우리가 행한 모든 무익한 말들과 양심의 법을 어겨 행한 모든 죄들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결산 하게 될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각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들을 하나님 앞에 직고(直告)하게 될 것입니다.

 

첫 조상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 되어 살아가기로 결심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버린 죄로 인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눈물과 고통이 끊이지 않아왔습니다. 자연계도 죄로 깨어져버린 얼룩으로 양육강식의 고통가운데서 사람과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품에 있을 때는 자신의 앞날과 인생을 아이 스스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앞날에 전전 긍긍하며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는 것은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사람의 슬픔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고자 이 세상에 찾아오셨던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를 떠나 고생하며 방황하는 이들에게 손을 벌리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신고공유스크랩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삭제

"양심"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