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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사래와 하갈(2)

들풀도(fieldgrass)
2502 0 0
사래와 하갈(2) 창세기 16장
 
창세기 여기에서는 아브라하의 심령에 스쳐가는 불신앙을 보게 된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아브라함이 단순하고도 적절하게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떠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2절)
이런 말들은 불신앙으로 인한 조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담담한 자세를 취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성취를 하나님께 맡기고 단지 기다리고 있었어야만 했다. 빈곤한 인간의 마음에는 기다리는 자세보다는 다른 것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 그래서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지는 못하고, 자연히 용이한 것과 어떤 구상과, 그리고 무엇인가 의탁할 근거를 찾게 된다. 

 먼저 약속을 믿는 것과 그것의 성취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이런 구별을 한 아이에게서 계속 실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나의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하면 그는 나의 약속의 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나의 약속을 성취해 주는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심히 불안해 하고 또 조급해 한다. 제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어린아이의 행위에 자신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아브라함이 15장에서는 믿음을 나타내 보이나 16장에서는 인내의 실패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에 있는 사도의 말의 위력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고 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믿음은 그것을 믿고, 소망은 그것을 바라보고, 인내는 그것을 조용히 기다린다. 그러나 사라의 경우를 보자. 그녀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진정한 의미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여호와께서는 나에게는 실패하셨다. 아마도 나의 애굽인 하녀가 나를 대신할 것이다." 불신앙의 영향 아래서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은 빠지고 그 외에는 무엇이든지 도사리게 된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해 주심과 그의 무오한 성실하심과 실수 없는 충족시키심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에 우리 자신이 휘말려들고 있음을 목격하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의 적절한 간증 생활에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의 조용하고도 조화된 상태를 우리는 상실해 버린다. 그런 나머지 여러 사람과 같이 단순히 우리가 소원하던 것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편리한 것이라면 다 강구하면서 "멋지게 수단을 잘 이용했다" 고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던 위치에서 떠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 결과가 비참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사라가, 육은 나를 실패하게 했지만 하나님이 나의 회복이 되신다고 말했더라면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의 마땅한 근거가 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육이 그녀를 실패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의 일면인데 도 그녀는 다른 면에서 육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녀는 육의 모든 면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과 신앙의 판단에 의하면 하갈의 육이라고 해서 사라의 육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육이야 늙었든지, 젊었든지 간에 하나님께는 매한가지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오직 우리가 이런 진리의 위력 속에 있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의 중심을 체험적으로 발견할 때이다. 저 영광스러운 존재자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떼는 때에는 이미 우리는 불신앙의 저속하기 그지없는 속임수에 휘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능히 모든 피조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있는 때는 유일하게 참되고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기대어 있을 때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신앙도 아니다. 신앙은 도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데 그것은 도구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도구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신앙은 오직 도구만을 바라보고 그 도구의 외견상의 효능만을 따져 어떤 사건의 성공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면서 은혜 가운데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충족성을 따라 도구의 가치를 따져 성공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다윗을 보고 그 다음에 블레셋 사람을 본 후 사울이 다윗에게 "너는 이 블레셋 사람과 싸우러 나갈 수 없다. 너는 소년이니라" 고 말한 것과 꼭 같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문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실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믿음의 길은 매우 단순하고도 좁은 길이다. 그것은 수단을 신성시하지도, 멸시하지도 않는다. 신앙의 수단이 오직 하나님의 쓰시는 분명한 수단이라면 그 가치대로 평가할 수 있다. 그 이상 결코 더 넘어가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유익이 되도록 피조물을 사용하시는 것과 내가 하나님을 배제하기 위해 피조물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충분히 다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해 까마귀를 사용하였으나, 엘리야는 하나님을 배제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진실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이 쓰시는 수단 자체를 놓고 문제시할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수단이라면 기꺼이 하나님께 서는 그것을 축복하실 것이고 그것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것을 예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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