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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하나님의 회복의 참된 성격(창13장)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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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의 참된 성격(창13장)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 상태에서 흔들린 나머지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양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며 또 하나님의 회복의 적절한 지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대로 행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회개시키시고, 회복하시고 또는 준비하실 때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인격대로 하신다.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이 언제나 유일하게 하나님의 행위의 표준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제한시키려"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듯이 아무 것에도 하나님을 제한할 수는 없다. 

지금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우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음 장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 장소란,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3, 4)는 곳이다. 방랑자나 퇴보자에게 있어서 그가 전적으로 원위치로 회복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란 없다. 우리 마음이 생각하는 자기 의의 측면에서 볼 때, 방랑자나 퇴보자는 아무리 회복이 된다 하더라도 이전에 차지했던 위치보다는 조금이라도 낮은 위치를 취해야 할 것이며 또 자기 자신이 행한 일이나 성격으로 보아 마땅히 이전보다는 더 낮은 위치를 취함이 백 번 지당하다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회복의 표준을 확정짓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대권이다.

하나님의 표준은 다음 구절에 잘 명시되어 있다. "오 이스라엘이여,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회복은 명실공히 그러하다. 명실공히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아예 회복시켜 주시지 않으시든지, 아니면 회복시키실 바에는 그의 은혜의 부를 확대하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으로 하신다. 그러므로 문둥병자가 다시 돌아온다면 "회중의 회막문" 앞에까지 실제로 인도된다. 탕자가 돌아온다면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된다. 베드로가 회복되었을 때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 앞에 서서 "너희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을 부인했었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회복되었다.



이것은 베드로가 아주 각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행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이 모든 경우와 이외의 기타 많은 경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신다. 그것은 은혜의 온전한 능력과 믿음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다.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아브라함은 처음 
장막을 쳤던 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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