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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과 “탕자”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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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하고 패역한 아들”과 “탕자”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다른 각도에서 이스라엘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배교하는 세대로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 18-21)

 여러분은 패역한 아들을 엄중하게 법과 징벌로 다루는 장면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아름다운 비유와 흥미롭게 대조시켜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신명기 21장과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다소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는 얼마나 판이한가? 그 양상은 얼마나 판이한가! 율법 아래서는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돌에 맞아 죽게 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가장 값진 옷으로 입히며 손에 반지를 끼우고 함께 식탁에 앉아, 돌아온 자식 때문에 마음이 심히 기쁨을 온 집안에 알려 집안을 즐거운 분위기로 만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신명기 21장에서는 의로운 통치를 하시며 패역한 자에게 심판을 가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반면,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불쌍한 회개자에게 온정을 베풀고 잃었던 자가 돌아온 것만이 그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 계속 고집불통의 패역자는 심판의 돌을 얻어 맞으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사랑의 입맞춤을 받는다.
 
 본장 마지막 문단을 유의해 주기를 바라며 본장 강해를 마칠까 한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영감받은 사도는 매우 주목할 만한 방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 설명은 얼마나 흥미롭고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설명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불쌍한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오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은혜를 우리에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일반적으로는 모세의 글과 특수하게는 신명기 21장의 글을 친히 인쳐 주시는 방법을 놀랍게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너무도 완벽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한 부분이 침해를 받으면 성경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동일하신 성령께서 모세의 글과 예언서와 일반 및 특수한 모든 사도 서신들과 지금의 심오하고도 고귀한 성경 구절에 영감을 주신 것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중대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의무요, 높은 특권이라고 확신한다. 육적 태만과 냉담한 무관심과 적극적인t 도전이 만연한 오늘날, 여러분은 이 귀한 진리를 주목하고 굳게 잡으며 강하게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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