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소식-칼럼: 사래와 하갈(1)
사래와 하갈(1) 창세기 16장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4절)
이것은 수많은 슬픔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슬픔은 육의 근원을 서둘러 추구한 데서 나왔다. 사라의 위엄이 애굽인 여종에게 사정없이 짓밟혔다. 사라는 자기 자신이 허약과 경멸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다. 위엄과 권위의 유일한 참된 위치는 허약과 의존을 느끼는 위치가 되었다.
믿음으로 행하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큼 자기 주위의 잡다한 것에 전적으로 초연한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이 육이나 세상에 빚진 자가 되는 순간에 그는 자기의 위신을 손상시키며 자신은 큰 손실을 입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리 조금일망정 믿음의 길에서 이탈함으로 인하여 당하는 손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
그러나 믿음의 길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시련과 곤경을 당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특별히 속한 축복과 기름은 오히려 손상보다 무한히 더 크다는 점이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5절)
우리는 잘못 행했을 때 흔히 그 불평을 다른 사람에게 하게 된다. 사라는 단지 자기 자신이 제안했던 결과를 거두고 있는데도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는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그녀가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을 면해 보려고 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6절)
이것은 좋은 처사가 아니다. "여종"을 학대 때문에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오에 대한 결과를 남을 못살게 학대함으로써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흔히 우리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실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가 실수를 했으면 겸손하게 실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라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과오를 저질렀다는 생각마저 없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방법을 써서 자기 자신을 구출해 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하기 이전에 그것을 수정해 보려는 온갖 노력은 단지 우리의 길만 더 곤란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갈은 다시 돌아와 아이를 낳았지만, 나중에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 아들은 전혀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