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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아브라함. 그랄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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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랄에 우거(寓居)한 아브라함
 
 창세기 20장에서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때때로 굴복하게 되는, 세상적 관점에서 본 도덕적 타락과 둘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언제나 그 자녀에게 속해 있는 도덕적 위엄이다. 

 아브라함은 환경으로 인한 두려움을 내비쳤다. 그의 마음은 곧바로 그것을 피악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우거하면서 그 곳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판단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는 그랄 사람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랄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자기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몇 년 전 애굽에서 사용한 바 있던 동일한 계략을 또 쓰고 있다. 이것은 매우 교훈적이다. 
 믿음의 조상이 그의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떼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연약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만이 참으로 강해지는 비결임은 얼마나 참된 진리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에 서 있는 한 아무것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하나님만 의탁했더라면 그랄 사람들이 전혀 그를 상관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아무리 끔찍한 난경(難境)에 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브라함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했어야만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자기의 위엄을 유지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불명예롭게 하며 그 결과 모든 긴급한 일을 하나님이 충분하게 대처해 주신다는 생각을 상실함으로써 그들이 세상 앞에서 스스로 초라하게 낮아짐을 본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슬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인식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어떤 양상과 어떤 모습을 띠는 세상이든 늠름하게 초탈할 수 있다.

믿음만큼 도덕적인 모든 것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믿음은 이 세상의 생각을 전적으로 능가할 수 있다. 

 세상 사람이나 또는 아직도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스 도인이야 어찌 믿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으랴? 
 
 불가능하다. 

 믿음이 이끌어 오고 있는 삶들은 저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저들은 단지 현재에 속한 것들의 표면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소망과 신뢰의 적절한 기초를 볼 수 있는 한, 
저들은 소망적이고 신뢰적인 사람이 될지는 모르나, 그러나 
저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오직 신뢰한다는 사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육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지극히 평온할 수 있다. 육이 판단할 때에는 믿음은 무모하며 선견지명이 없으며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음의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외에는 아무도 그러한 행위의 확고하고도 진실로 합리적인 기초를 참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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