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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소식-칼럼: 화목이 그립습니다.

들풀도(field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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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이 그립습니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지치며 자신을 소모해가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몸이 너무도 피곤한 시간 울리는 긴급 호출소리에 환자를 돌보고자 달려 나가는 의사들에게 뿐만 아니라 피곤함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새벽시간 울어 젖히는 울음소리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어나는 엄마들에게 있어서도 생명을 돌보는 시간 속에는 자기희생과 수고의 봉사가 항상 동반됩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기의 시간을 내어드리는 이 소모적인 희생에 대해 하나님은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는지요
그러기에 부모들이 기저귀 갈고, 분유를 먹이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내어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거나 허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영혼(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돌봐달라는 신성한 위탁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을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을 저희에게 주셨음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두신 처소에서 사람들을 자신에게 맡기시고 위탁하신 이 관계 가운데 주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드리며 자신을 소모하신 본처럼,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섬겨주길 바라심이 아닐런지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뱉어낸 제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맡기신 양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요21:15-17) 의사를 찾는 환자들처럼,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구하는 아이들, 우리로 만나게 하는 사람들,  알고 보면 이들 모두 하나님께서 저희 각자에게 맡기신 소중한 영혼들은 아닐 런지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요일2:4-6)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영혼을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양심으로 지키느냐 아니냐로 그가 어디에 속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고 주님은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한 분으로 누리시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저희 모두를 초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을 핑계 삼아 거룩한 주님의 명령인 새 계명을 소홀함 없이 대하게 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는 변명은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에게 스데반 형제가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준 것처럼, 수많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죽음가운데서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사랑을 나타낸 사실을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자비롭게 대하는 사랑의 열매인 하나님의 성품이, 저희 영혼 깊은 가운데  맺히지 않음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며, 배고파하지 않고, 목말라 하지 않는다면 어찌 아름다우신 주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부어지며 나타날 수 있을까요? 부모의 끊임없는 헌신과 사랑의 섬김을 통해 자라난 아이들이 성장해서 부모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이 된 것처럼, 보고 만진바 된 생명, 우리의 육체를 통해 보여 지고 만진바 된 흘러나오는 생명을 볼 수 없다면, 입술을 통해 어떤 신비를 쏟아내더라도 이는 공허한 진리, 날카로운 송곳,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아닌 죽어가게 만드는 사문화된 말씀일 따름입니다. 주의 임재가 계신 그 곳은 더듬거리더라도, 아무 말씀이 없더라도 따뜻함과 훈훈함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리로 달려가 쉼을 얻습니다. 
 진리에 대한 자기들의 열심으로 주님을 알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저희는 자주 평가절하하며 가벼이 대하지만, 날카로운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자신이 주님을 모르던 그들의 자리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시간일 따름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마9:13전)
연약한 자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옴에 대해사람 안에 있는 기준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제한시켜 버림으로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실족케 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가운데 실족케 하는 자가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실족함을 당한 자가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 우는 이상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입니다.
 사람의 보는 기준에 많이 못 미치고 부족하더라도 어렵게 고백한 간증에 대해,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며, 있는 모습그대로 받아줌이 없는 곳에서는 어느새 진실한 고백과 간증은 사막처럼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주께서 저희가운데  연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안아주며, 손잡아주고, 등 두들겨 주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시길 구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

실로 아름다우신 우리 주님이 당신의 집에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의 풍성함보다 화목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을 고백하는 자마다 사람들과 화목함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함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요일 4:20,21)
오늘날 기름지게 넘쳐나는 말씀의 양식보다, 화목함이 더욱 그립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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